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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반 superveience
    카테고리 없음 2020. 3. 20. 09:22

    수반 superveience

    수반 Supervenienc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두 개의 사물이 B 속성에 대해 다르지 않고서 A 속성에 대해 다를 수 없는 경우에만, 속성 A 집합은 어느 다른 속성 B 집합을 수반한다. 즉, “B-차이 없이 A-차이는 있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어느 완벽한 위조범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녀의 그림 복사본은 예술품 딜러를 속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염료의 분자 배치에 이르기까지 원본의 완전한 복제품이다. 그녀가 엘 그레코의 <톨레도의 풍경>의 복제품 같은 것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원본과 다르다. 그것은 위조품이다. 그것은 엘 그레코가 그린 것이 아니고, 경매장에서 덜 가치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 모조품은 다른 측면에서 원본과 정확히 비슷하다. 그것은 원본과 같은 모양, 크기, 무게를 가진다. 캔버스의 표면은 [원본과 비교해볼 때] 색, 모양의 동일한 배열을 가진다. 정말로, 이 모조품은 동일한 조명 조건 하에서 한 명의 감상자에게 원본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원본 만큼 아름다운 것 같다.

    <이 모조품이 원본과 공유한다고 보장되는 속성>은 그것의 미시물리적microphysical 속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미시물리적으로 동일한 두 그림은 단지 캔버스 위의 모양과 색의 배열에 있어서 유사하다고 보장되는 것이다. 즉, 당신은 “미시물리적 속성을 바꾸지 않고서는” 어떤 그림의 캔버스의 색과 모양의 배열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색과 모양의 배열이 그것의 미시물리적 속성을 수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반은 분석 철학에서 주요한 개념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호소된다. 가령, 미학, 도덕, 정신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을 수반한다고 말해진다. 양상적 참은 비-양상적 참을 수반하고, 일반적 참은 개별 참을 수반한다고 말해진다. 더욱이, 수반은 다양한 종류의 내재주의와 외재주의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고, 환원가능성과 개념적 분석에 대한 주장을 시험하는 데 사용된다.

    수반은 기반grounding과 존재론적 의존ontological dependence 같은 개념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들 간의 관계를 다룬다.

    소개

    수반의 핵심 개념은 “B-차이 없이 A-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슬로건에 의해 포착된다. 단어 ‘- 수 없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반 주장은 단지 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A-속성이 B-속성을 수반한다 iff A-속성에서의 어떤 차이는 B-속성에서의 어떤 차이를 요구한다

    iff B-속성에 대한 정확한 유사성이 A-속성에 대한 정확한 유사성을 보장한다.

    수반 주장은 양상적 힘force을 지닌다. 양상적 힘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다; 다른 수반 주장은 다른 종류의 필연성을 B-속성과 A-속성 간 연결 때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양상성이 고정되어 있을 때 조차도, 위 슬로건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다수의 철학적 작업은 수반의 이러한 형태들을 구분해왔고, 이것들을 쌍으로 (수반과 양상성) 논리적인 관계를 조사해왔다.

    우리는 간략한 역사적 언급을 가지고 시작할 것이고, 그 뒤에 수반에 대한 일반적인 물음으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가령, 이것이 설명적인지 여부, 수반이 함축을 보장하는지 여부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버젼의 수반을 탐구할 것이다. 기술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이것은 수반의 다양함이 다른 철학적 목적들에 대해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 흥미로워진다. 따라서 비록 대부분의 이러한 시작이 그 적용 보다는 수반 자체와 관련될지라도, 우리는 결국 수반과 관련된 중요한 철학적 논쟁에 대한 논의에 이를 것이다.

    3. 수반과 다른 관계들

    3.1 수반 관계의 양상적 힘

    어떻게 수반이 다른 관계들에 연결되는지를 분류하기 위하여, 우리는 수반이 다양한 정도의 양상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논의해야 한다. 즉, “B차이 없이 A 차이가 있을 수 없다”에서 단어 ‘-일 수 없다’는 다양한 힘으로 나타난다. 가령,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자연법칙에 일관적일 수 없다’ 등으로.

    이것은 어떤 논쟁적인 이슈를 제기한다. 우리는 현재 목적에 맞춰 다음의 3 가지 가정을 만든다.

    우리는 형이상적 필연성이 논리적 필연성 만큼만 강하다고 가정한다. 분명히 (논리적 참이 아니면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 참이 있다. 가령, 물=H2O에 대한 참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가능성의 공간이 정확히 논리적 가능성의 공간과 동일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 만큼만 강하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 =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세계 (맥라우린, 챠머스, 잭슨) 이것은 논쟁적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것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 안에서 헤아리는 어떤 속성이 자연법적 역할을 필수적으로 하지 않고, 따라서 그 속성들이 문제의 그 법칙 내에서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이것 역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무엇이든지 간에 자연법적으로 필연적이지만,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고 가정할 것이다. (우리는 -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지 않으면서 - 자연법적으로 필연적인 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모든 자연법적 속성이 반드시 그것의 자연법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Fine 2002)

    일부의 수반 관계는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다. 머리 모양임 또는 넙치임 속성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두 개의 기저 속성 머리 모양임 속성과 넙치임 속성을 수반한다: 두 사물은 - 머리 모양임에 대하여 또는 넙치임에 대하여 다르지 않고서 - 머리 모양임 또는 넙치임에 대하여 다를 수 없다. 또한, 완전한 구의 겉넓이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그것의 부피를 수반한다. (반대도 그러하다)

    일부 수반 관계는 형이상학적으로 우연적이다. [금속의 전기 전도성은 열전도성에 공변한다는co-vary] 비드만-프란츠 법칙을 고려해보자. 이 법칙은 전기 전도성과 열 전도성이 서로를 수반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이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우연적이라는 전제 위에서도 이 수반 관계는 동일하게 그러하다. 다른 종류의 전도성의 차이 없이 어느 한 종류의 전도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단지 자연법적으로 필연적일 뿐이다.

    따라서 수반 관계는 형이상학적 또는 자연법적 필연성을 가지고 성립할 수 있고, 심지어 어느 다른 종류의 필연성을 가지고도 성립할 수 있다. 수반이 다양한 양상적 힘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종종 어떤 수반 관계가 성립한다는 광범위한 합일이 있지만 그 양상적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적이다.

    예1) 심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을 수반한다.

    거의 모두가, 심지어 데카르트적 이원론자 조차도, 어떤 버전의 예1의 수반 주장을 믿는다. 그러나 수반 관계가 형이상학적 또는 단지 자연법적 필연성을 가지고 성립하는지 여부에 대한 격렬한 불일치가 있다. 스스로 물어보라. (의식적인 개인과 물리적으로 구분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의식적인 경험을 결코 갖지 않는 개인이 있을 수 있는가? (Kirk, 챠머스) 즉, 철학자들이 ‘좀비’라고 부르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정신적인 것이 자연법적으로 물리적인 것을 수반한다는 것은 널리 합의되기 때문에, 좀비가 자연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널리 합의된다 - 그들의 존재는 심리물리적 법칙을 위배한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챠머스)는 좀비는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생생한 논쟁의 문제로 남아있고,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상가능성conceivability과 형이상학적 가능성 간 관계에 대한 어려운 물음을 다뤄야 한다. 이 논쟁은 정확히 “어떤 물리적 차이 없이 어떤 심리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에서 ‘-수 없다’의 양상적 힘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3.2 수반과 함축

    수반은 함축의 한 형태인가? 이 수반과 함축 관계는 어떤 방식에서 논리적으로 유사하다. 함축 관계는 재귀적, 이행적, 그리고 반대칭적non-symmetric이고, 수반도 그러하다.

    수반은 재귀적이다: 속성 A의 임의의 집합에 대하여, A-차이 없이 A-차이는 있을 수 없다.

    수반은 이행적이다: 만약 A 속성이 B 속성을 수반하고, B 속성이 C 속성을 수반한다면, A 속성은 C 속성을 수반한다. 그러나 수반은 대칭적이지도, 비대칭적asymmetric이지도 않다. 수반은 반대칭적이다. 수반은 종종 대칭적으로 성립한다. 모든 수반의 재귀적인 경우는 사소하게 대칭적인 경우이다. 전술된 완벽한 구의 부피와 겉넓이의 경우를 고려해보라. 그리고 수반은 종종 비대칭적이다. 가령, 정신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을 수반할 수 있는 동안에, 물리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을 수반하지 않는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논란의 여지가 적은 방식은 <근본적으로 물리적으로 다른 것들 (가령 세탁기와 종이 가방)은 정신적 속성의 결여 때문에 정신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반은 함축과 같이 재귀적, 이행적, 그리고 반대칭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데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다.

    (속성 함축의 개념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것이다:

    P를 소유한 어느 것이든지 Q도 소유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경우에만 속성 P가 속성 Q를 함축한다.)

    그러한 함축이 수반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형제임과 자매임 속성>을 고려해보자. <형제임> 속성을 소유하는 것은 <자매임> 속성을 소유하는 것을 함축한다; 모든 형제는 자매이다. 그러나 <자매임>은 <형제임>을 수반하지 않는다. 두 사람들은 (<형제임>에 대해 정확히 동일할지라도) <자매임>에 대해 다를 수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사라는 여동생을 가졌고 잭은 외동아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사라는 자매이고, 잭은 아니다. 이들 중 누구도 형제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B-속성은 A-속성을 - A가 B를 수반하지 않더라도 - 함축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예는 적절한가? 이 예의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에 일단 넘어간다.

    수반이 함축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수반이 오직 자연법적 필연성을 가지고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회상해보자. 그런 경우에, 함축은 없다. 가령, 열 전도성 속성은 전기 전도성 속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분명해)

    그러나 형이상학적 또는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수반에 대한 것은 무엇인가? 심지어 그것은 A-속성을 함축하는 B-속성이 있음을 일반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A가 B를 논리적으로 수반함은 무언가가 A-wise인 방법이 무언가가 B-wise인 방법을 함축하는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A-속성이 B-속성에 의해 함축된다는 것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두 사례를 고려해보자.

    사례1) 부정의 negative 속성이 있다는 가정 위에서, 모든 속성 F는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그것의 보완물인 ~ F를 수반한다. 결국에, F와 ~F는 - 그것들이 ~F인지 여부에 대해 다른 것 없이 - 그것들이 F인지 여부에 대해 다를 수 없다. 그리고 반대도 그러하다. 그러나 분명히 은 <~F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맥라우린)

    사례2) 속성 집합 B가 속성 P와 속성 Q만을 포함하는 경우와 속성 집합 A가 연언 속성 P&Q의 단위 집합인 경우를 고려해보자. 즉, A={P&Q}이고, B={P, Q}. A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B를 수반한다. 그러나 B 안에서 A-속성을 함축하는 속성은 없다.

    이제, A가 B를 수반함이 A-속성을 함축하는 B-속성이 존재함을 보장하는 속성에 대한 특수한 집합이 있을 수 있다. 즉, 보완성complementation에 대한 불 대수, 무한 연언, 무한 선언, 양화를 포함한 연산 하에서 닫혀있는 속성 집합이 있을 수 있다 (Kim 1984). 이러한 연산 하에서 {F} 그리고 {~F}에 닫혀있음은 동일한 집합을 초래할 것이다. 즉, {F, ~F, F&~F, F V ~F … }. 그러면, 두 경우에서, 이러한 연산들 하에서 B의 닫혀있음은 사실 A-속성을 함축하는 어느 속성을 포함한다.

    수반 논의는 종종 그런 연산 하에서 닫혀있는 속성 집합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것은 2 가지 이유 때문에 사소한 가정이 아니다.

    (이유 1) 보완성, 연언, 그리고 선언이 적법한 속성을 형성하는 연산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들이 있는지 여부는 대체로 속성들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의존한다. 만약 속성이 단지 술어에 대한 의미론적 값이라면, 부정, 연언, 그리고 선언적 속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부정, 연언, 선언적 술어는 의미론적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속성이 보편자라면, 그런 모든 속성은 있을 수 없다. (Armstrong) 그리고 만약 속성이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라면, 속성 집합은 불 연산 하에서 닫혀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임의의 속성 F에 대하여 역시 하나의 속성이라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anything이 있을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이유 2) 비록 속성을 만드는 연산이 적법하다고 가정될지라도, 우리가 종종 그런 연산들 하에서 닫혀있지 않은 속성 집합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정negation을 고려해보자. 부정 속성이 있다는 것을 가정할 때 조차도, 우리는 표준적으로 고양이를 지질학적 속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퇴적물도 아니고, 변성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 단지 심리적 물질은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 물리적 속성을 가진 심리적 물질에 집중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해보인다. 모든 속성 집ㅈ합이 모든 속성을 만드는 연산 하에 닫혀있기 때문에, 수반은 일반적으로 함축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

    함축 실패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경우는 속성 집합이 양화 하에서 닫혀있을 때 발생한다. 이것은 수반해주는 집합 A가 양화에 의해 형성된 속성을 포함하고, 마치 모든 F가 G인 그런 것과 같이, 수반해주는 집합 B는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만약 B가 그런 속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런 속성을 함축하는 B에서의 속성은 없다. 러셀이 말했듯이, “당신은 개별 사실로부터 연역적 추론에 의해 일반적 사실로 도달할 수 없다 그 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러나 일반 속성은 논리적으로 개별 속성을 수반한다: 어떤 두 개의 가능 세계도 일반적 사실이 개별 사실이 성립하는 것의 차이 없이 일반 사실이 성립하는 것에 다를 수 없다. 따라서, 일반 사실은 논리적으로 개별 사실에 수반한다. 비록 개별 사실이 일반 사실을 함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결과는 속성 집합 A가 속성 집합 B를 논리적으로 수반함은 - 만약 A와 B가 무한 불 연산과 양화를 포함한 속성을 만드는 연산 하에 닫혀있다면 - 단지 각 A-속성은 어떤 B-속성에 의해 함축됨을 보장하는 것일 뿐이다.

    3.3 수반과 환원

    모든 사람들은 환원이 수반을 요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은 환원이 속성 동일성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반은 재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원에 대한 모든 합리적인 입장에 대하여, 만약 A-속성의 어떤 집합이 B-속성의 어떤 집합으로 환원한다면, B-차이 없이 A-차이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존재론적 환원과 “개념적 환원” 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즉 개념적 분석 둘다에 대해 참이다.

    더 흥미로운 문제는 수반이 환원에 대해 충분한지 여부이다.(kim) 이것은 환원이 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에 의존한다. 만약 [환원]이 속성 동일성 또는 함축을 요구한다고 간주된다면, 방금 봤듯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수반 조차도 환원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 더욱이, 만약 환원이 어떤 인식적 조건을 충족되는 것을 요구한다면, 다시 한번,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수반은 환원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 논리적 필연성의 문제로서 A가 B를 수반함은 선험적으로 알 수 있어knowable야 할 필요는 없다.

    3.4 수반과 존재론적 무해함 innocence

    함축과 환원에 대한 문제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진 수반이 존재론적으로 무해한지 여부 - A 속성은 B-속성 위에 있는(덧붙여진) 아무 것인지 여부 - 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다.

    일부 학자는 수반은 - 적어도 기반과 동반할 때 -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 존재론적으로 무해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만약 A-속성이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B-속성을 수반한다면, 그 A-속성은 자동적으로 주어진 B-속성으로 나아간다[된다] come along. 크립키의 은유를 빌리자면, 만약 신이 B-속성을 고정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A-속성이 나아가는 것going을 얻기 위해 더한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실로, 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B-속성의 분포distribution를 고려할 때, A 속성이 예화되는 것에 대한 더한 문제는 없다. 따라서, 후자[B-속성]는 전자[A-속성]에 덧붙여진 어떠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생각에 격렬히 저항한다. 만약 A-속성이 B-속성과 수적으로 다르다면, 어떻게 A-속성은 더한 존재론적 개입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인가?

    이 논쟁은 형이상학과 심리 철학에서 다양한 문제의 준심에 있다. 가령,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는 종종 심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과 다르지만, 물리적 속성에 덧붙여진 어떠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환원론자의 반대자들은 분명 이것은 비적법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이 배제exclusion 문제에 직면하는 (그들이 모든 결과가 “이중으로 야기된”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서 정신의 인과적 효능efficacy을 설명할 수 없는) 책임charge에 있다고 보여질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구성composition과 관련이 있다. 일부 사람들 - “무제한적인 부분론적 구성”을 믿는 사람들 -은 임의의 두 개 또는 더 많은 사물은 더 큰 사물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보통 (단일의) 융합이 그것의 부분들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동안에, 그 융합은 그 부분들을 수반하고 따라서 그 융합은 그 부분들 “위의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너의 왼쪽 팔꿈치, 토니 블레어, 그리고 미시시피 강의 부분론적 융합이 있고, 이것들은 그 세 부분들과 다르지만, 그 부분들 위의 어떤 것도 아니다. 송어와 칠면조의 융합을 말할 때, 루이스는 그 융합된 것은 물고기도 닭도 아니지만,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부분 물고기와 부분 닭이다.” 그리고 그는 “부분론은 무해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제한적 부분론적 구성의 반대자는 당연하게도 납득하지 않는다: “ ‘-위에 어떤 것도 없다 nothing over and above’는 무슨 의미인가? 이 이해하기 어려운 slippery 어구는 철학에서 많이 사용되어 왔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어구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결코 설명된 적이 없다. 실로, <구성이 최소한으로 존재론적으로 무해하다는 것>은 <어떠한 복합 대상도 없다>는 [일부의] 말을 하게끔 해왔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수반 직관”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있다.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는 <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대한[을]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으로] 수반함은 정신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 위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무제약적 부분론적 구성에서 이들은 <융합이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수반함은 융합은 그 부분들 위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이성[구별성]distinctness 직관” 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있다 - 만약 <정신적 속성과 부분론적 융합>이 <물리적 속성과 부분론적 원자들>과 각각 다르다면, 전자의 쌍은 후자의 쌍 위의 어떤 것이라고 간주된다.

    이것은 마치 “ - 위의 어떤 것도 없다” 와 “존재론적 무해함” 같은 어구를 최선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용어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여지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진정한 문제가 있다. [전술된 두 어구] 간 중요한 차이는, 어떤 자들은 두 종류의 속성 또는 존재자가 수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다른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간에 밀접한 비동일성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의의 주어진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1) 개별 비동일성 관계가 성립하는 것, 과 2) 그 관계가 성립함은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완화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 검토중인지 여부이다.

    부분론적 융합의 경우에서, 이 문제는 단지 융합이 존재하는지 여부일 뿐이다. 무제한적 부분론적 구성을 믿는 자들은 원자의 존재는 융합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반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이 논쟁은 단지 융합이 - 그것이 부분들에 상당한 존재론적 개입을 만드는 한 - 그것의 부분들 “위의” 아무 것인지 여부에 대한 것이고, 이 논쟁은 일부 학자에게 무제한적 부분론적 구성의 원리에 대해 의심하게 이끈다.

    비환원적 물리주의 경우에서, 이 문제는 모든 비동일성 관계가, 배제 논쟁과 관련되는 한, 똑같은지[동등한지]에 대한 것이다.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는 정신적 속성이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물리적 속성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의해 함축되는지 여부는 물리적 속성들의 집합을 닫고 있는 어떤 속성을 형성하는 연산에 의존한다) 이 흥미로운 물음은 (이것이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 “위의” 있다는 것을 참되게 말하게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부분론적 융합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자. Merricks(2001)은 비유기적 복합물의 존재를 거부하는 논증을 펼치기 위해 어떤 버젼의 배제 문제를 사용한다.

    융합의 경우와 비슷한 예가 더 있다. 우리는 일반적 참이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개별. 참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일반적 참은 개별 참에 의해 함축되지 않는다. 이것은 러셀로 하여금 “당신은 일반적 참과 개별 참이 다르다고, 일반적 참은 개별 참 위의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게 이끈다. 일반적 사실이 개별 사실 “위에” 있다는 러셀의 주장에 너무 많이 집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분명 단지 일반적 사실은 개별 사실과 수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이 흥미로운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일반적 사실을 우리의 존재론 속으로 수용해야 하는에 대해 러셀이 옳은지 여부에 대한 문제이다.

    통틀어 보자면,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진 수반이 존재론적으로 무해한지 여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없을 수 있다.

    3.5 수반, 기반Grounding, 그리고 존재론적 의존

    기반에 대해 거칠게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 때문에 in virtue of 또 다른 사실이 존재할 때[성립할 때] obtain, 하나의 사실은 어느 다른 사실을 기반한다. 이것은 생산적이고, 발생적인 관계다.

    존재론적 의존에 대해 거칠게 말하자면,

    하나의 존재자는 또 다른 존재자 없이 존재하지 않을 때, 하나의 존재자는 어느 다른 존재자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

    더 많은 것들이 이 관계들에 대해 말해져 왔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현재 우리 목적에 충분하지 않다.

    기반과 존재론적 의존은 서로 다르다. 이것을 알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인과와 인과적 의존이 다르다는 루이스에게 밝혀진 경우의 종류를 통한 것이다: 선취 preemption와 과도결정 overdetermination. 인과적 과도결정과 선취의 경우가 인과적 의존 없이 인과에 연루된 것처럼, ‘기반 과도결정’과 ‘기반 선취’의 경우도 존재론적 의존없이 기반에 연루된다. 예를 들자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반하지만, 후자 사실의 성립함은 전자 사실의 성립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규모로[대량으로] 과도기반된다.

    기반과 존재론적 의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수반이 기반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수반이 존재론적 의존과 같은 게 아니라는 주장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같은 고려들이 관련된다.

    하나의 그러한 고려는 이러한 관계들은 같은 관계항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수반은 일반적으로 속성 또는 속성들의 족families 간 관계라고 말해지지만, 적어도 일부 기반의 옹호자는 기반은 오직 사실들 간 관계이고, 존재론적 의존은 다양한 존재론적 범주들의 멤버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한다.

    수반이 기반 또는 존재론적 의존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후자의 두 관계들[기반, 존재론적 의존]은 비재귀적이고 비대칭적이라고 널리 생각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그 자신을 기반하거나 존재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어떤 것도 그것을 기반하거나 그것에 의존하는 어떤 것을 기반할 수 있거나 존재론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수반은 재귀적이지만 비대칭적이지 않다.

    수반이 기반 또는 존재론적 의존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세 번째 방법은 다음의 조건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 만약 A가 B를 수반한다면, B는 A를 기반한다

    * 만약 A가 B를 수반한다면, A는 B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

    1995 년에 맥라우린McLaughlin이 말했듯이, 순전한 수반 주장은 어떠한 “때문에” 주장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 이것을 알아 보기 위한 2 가지 방식이 있다. 전술했듯이, 임의의 속성 F에 대하여, F임은 ~F을 수반한다: 두 사물들은 ~F임에 대하여 다르지 않고서 F임에 대해 다를 수 없다. 그러나, 물론, ~F임은 F임을 기반한다. 그리고 F임은 ~F임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위 조건문들이 거짓임을 알아보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속성들>과, <임의의 속성에 대하여, 동종의 필연성을 가지고 어떤 것도 가능하게 수반을 가질 수 없는 속성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기 동일적임> 속성은 <골동품임> 속성을 수반한다; <캥거루이면서 캥거루가 아님> 속성은 <먼지임> 속성을 수반한다. 그 이유는 충분히 단순하다. 어떤 두 사물도 필연적이거나 불가능한 속성, 기간에 대하여 다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두 사물도 임의의 속성 집합 B에 대하여 B-속성에 대해 다르지 않고서 그런 속성들에 대해 다를 수 없다. 어떤 것도 캥거루이면서 캥거루가 아닐 수 없고, 따라서 어떤 두 사물도 그 속성에 대하여 다를 수 없고, 따라서 어떤 두 사물도 <먼지임> 또는 <보라색임> 또는 <스팀엔지임> 속성 등에 대하여 다르지 않고서 그 속성에 대하여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캥거루이면서 캥거루 아님>은 <먼지임>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거나, <먼지임>은 <캥거루이면서 캥거루 아님>을 기반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먼지임>은 <캥거루이면서 캥거루 아님>과 어떤 관련도 없다.

    3.7 수반과 설명

    수반 주장은 그 자체로 속성( 또는 사실)의 어떤 패턴 변화가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이 주장들은 왜 그런 패턴 변화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연루된 그 의존성의 정확한 본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소수의 수반 논재는 그럼직하게 비이성적이다, 즉 설명 불가능하다. 왜 A-속성이 B-속성을 수반하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수반이 설명가능할 때, ‘superdupervenience 훌륭한 수반’이 존재한다.

    수반 논제가 무엇을 설명하는지 아는 것은 종종 쉽다. 3.5 절의 사소한 수반 관계의 사례를 고려해보자. 만약 A가 필연적이거나 불가능한 속성 집합이라면 (즉, A-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왜 B-차이 없이 A-차이가 있을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수반 관계는 수반해주는 속성의 필연성 또는 불가능성에 의해 설명된다. 왜 A-속성이 A-속성을 수반하는지도 분명하다. 물론, 속성 동일성 주장은 종종 선험적으로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물임> 속성은 속성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고려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임>과 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왜 에 대한 차이 없이 <물임>에 대한 차이는 있을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오직 자연법적 필연성만을 가진 수반은 자연 법칙에 호소함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전기 유도성이 자연법적 필연성을 가지고 열 전도성을 수반한다는 것은 비드만-프란츠 법칙 때문이다.

    우리는 수반 논제가 설명되어질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왜 [수반 논제]가 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수반을 가지고 만족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자면, 만약 도덕적 속성이 비-도덕적 속성을 수반하는 것이 말해진다면, 우리는 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이 있기를 기대한다. 설명 불가능한 수반 논제에 대한 호소는 따라서 미스테리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원문 출처: https://plato.stanford.edu/entries/supervenience/

    from http://jysden.tistory.com/21 by c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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